토도르 지프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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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도르 지프코프는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지도자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저항 운동에 참여했고, 1944년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장악하여 스탈린주의 정책을 펼쳤다. 1960년대에는 탈스탈린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사회 정치적 자유화를 시도했으나, 인권 탄압, 소수 민족 차별 등의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1980년대 말 동유럽 혁명으로 인해 사임했으며, 퇴임 후 공금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며, 최근에는 불가리아에서 사회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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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도르 지프코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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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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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토도르 흐리스토프 지프코프) |
출생일 | 1911년 9월 7일 |
출생지 | 불가리아 왕국 프라베츠 |
사망일 | 1998년 8월 5일 |
사망지 | 불가리아 소피아 |
배우자 | (1936년 - 1971년) |
자녀 | |
종교 | 무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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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소피아 시장 | 1949년 5월 27일 - 1949년 11월 1일 |
불가리아 각료 평의회 의장 | 1962년 11월 19일 - 1971년 7월 7일 |
불가리아 국가 평의회 의장 | 1971년 7월 7일 - 1989년 11월 17일 |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 서기 | 1954년 3월 4일 - 1981년 4월 4일 |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81년 4월 4일 - 1989년 11월 10일 |
소속 정당 | |
정당 | 불가리아 공산당 (1932년–1989년) 불가리아 사회당 (1998년) |
수상 | |
훈장 |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영웅 불가리아 사회주의 노동 영웅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훈장 시민 공로 훈장 스타라 플라니나 훈장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우스 훈장 애국 전쟁 훈장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파시스트 독일에 대한 승리 30주년 기념 메달 파시즘에 대한 승리 40주년 기념 메달 해방 100주년 기념 메달 소련 영웅 황금 별 훈장 (라오스) 레닌 훈장 10월 혁명 훈장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대조국 전쟁 승리 40주년 기념 메달 카를 마르크스 훈장 수헤 바타르 훈장 폴란드 복원 훈장 폴란드 인민 공화국 공로 훈장 호세 마르티 훈장 플라야 히론 훈장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별 훈장 사회주의 승리 훈장 공화국 훈장 (체코슬로바키아) 2월 승리 훈장 (체코슬로바키아) 백사자 훈장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대성 훈장 아즈텍 독수리 훈장 시리아 공로 훈장 국기 훈장 (북한) 국화장 (일본) 구세주 훈장 (그리스) 나일 훈장 (이집트) 엔리케 항해 왕자 훈장 (포르투갈) 레지옹 도뇌르 훈장 (프랑스) 이란 제국 건국 2500주년 기념 메달 올림픽 훈장 |
2. 생애
토도르 지프코프는 불가리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불가리아 공산당(BCP)의 전신인 불가리아 노동자당(BWP)에 가입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6][7]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협력하는 정부에 맞서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9]
전후 공산당 내에서 입지를 다져 1954년 당 제1서기에 올랐다. 초기에는 체르벤코프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주의 노선에 발맞춰 체르벤코프를 비판하고 실권을 장악했다.[10][11] 이후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총리를 역임했고, 1971년부터는 신설된 국가 평의회 의장으로서 국가 원수직을 맡았다.
지프코프는 1989년까지 총 35년간 불가리아를 통치하며 동구권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불가리아는 소련에 대한 완전한 정치적, 외교적 복종을 유지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초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공업화를 통한 경제 발전을 이루기도 했으나, 집권 후반기에는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 심화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 또한 연고주의와 부패가 만연했으며, 특히 1980년대 후반 터키계 소수 민족에 대한 강압적인 동화 정책과 추방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의 물결 속에서 국내외적인 사퇴 압력이 거세지자, 같은 해 11월 10일 당 서기장직에서 물러났고 곧이어 국가 평의회 의장직에서도 사임하며 오랜 통치를 마감했다. 그의 퇴진 이후 불가리아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는 빠르게 종식되었다.
2. 1. 초기 생애
지프코프는 1911년 9월 7일[8] 불가리아의 프라베츠 마을에서 농민 흐리스토 토도로프 지프코프[6]와 마루자 게르고바 지프코바[7]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출생일을 1911년 9월 20일로 주장했으나, 지프코프는 회고록에서 당시 출생 기록을 담당한 정교회 사제가 술에 취해 세례일만 기록하고 실제 출생일은 잊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지역 관습에 따라 실제 출생일이 세례일보다 13일 전인 9월 7일이라고 밝혔다.[8]1928년, 그는 불가리아 공산 청년 연맹(BCYU)에 가입했다. 이 조직은 나중에 불가리아 공산당(BCP)이 되는 불가리아 노동자당(BWP)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듬해 그는 소피아로 이주하여[89] 정부 공식 출판사인 ''Darzhavna pechatnitsa''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2년, 그는 BWP에 정식으로 입당했으며, 이후 당의 지역 위원회 서기 등을 역임했다. BWP는 1934년 쿠데타 이후 다른 정당들과 함께 금지되었으나, 지프코프는 소피아 내에서 자신의 직책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과의 동맹에 반대하는 불가리아의 저항 운동과 인민 해방 반군에 참여했으며, 5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동정심을 보였다.[9] 1943년, 그는 고향 프라베츠 근처에서 차브다르 유격대 조직에 관여했으며, 1944년 여름에는 소피아 작전 지역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944년 9월 9일 봉기 당시 친소련 군대와 유격대 활동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2. 권력 장악

1944년 9월 9일 쿠데타 이후, 지프코프는 '나로드나 밀리치야'(Narodna militsiya, 인민 민병대)로 이름이 바뀐 소피아 경찰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1945년 불가리아 공산당(BCP) 중앙 위원회 후보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정식 위원이 되었다. 1949년 트라이초 코스토프에 대한 반역 재판을 앞두고는 코스토프에 대한 관대함을 주장하며 당과 사법 당국을 비판하기도 했으나, 이후 스탈린주의 강경파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1950년 불코 체르벤코프가 이끌던 BCP 정치국 후보 위원이 되었고, 1951년 정식 위원이 되었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북서 불가리아에서 강제적인 집단 농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농촌 지역의 저항에 대응하는 데 관여했다.
1954년 3월, 지프코프는 불가리아 공산당 제1서기(1981년부터는 서기장)에 취임했다. 당시 불가리아 내에서는 지프코프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그의 서기장 취임을 체르벤코프가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1956년 4월,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지프코프는 체르벤코프를 스탈린의 추종자로 비판하며 그의 인물 숭배를 공격했고, 그를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이 시점부터 지프코프는 불가리아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후 지프코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흐루쇼프 해빙과 유사하게 상대적인 사회 정치적 자유화와 탈스탈린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스탈린, 체르벤코프 등과 관련된 인물 숭배로 여겨지는 기념물들을 철거하고 공공장소의 이름을 변경했다. 대표적으로 '스탈린 산'은 전쟁 전 이름인 무살라 산으로, '스탈린 시'는 바르나로 다시 바뀌었다. 지프코프는 자신에 대한 숭배 역시 경계하여, 고향 프라베츠 주민들이 그의 동상을 세웠을 때 감사를 표하면서도 철거를 명령하기도 했다. 이 동상은 지프코프 사후인 2001년에 복원되었다.[69][10][11][12]
지프코프는 과거의 "과도한 행위"를 중단시키고, 예술과 문화에 대한 당의 엄격한 통제를 완화했으며, 노역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규모를 크게 줄였다. 또한, 인민 법원에 의해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많은 사람들을 사면하고 정치적 재활시켰다. 유명 작가 디미타르 탈레프도 이때 복권되어 작가 조합 회원 자격을 회복하고 작품 활동을 재개했으며, 1966년에는 국민 의회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0][11][13]
BCP의 4월 전원 회의는 지프코프의 자유화 노선을 지지했으며, 이는 더 심도 있는 개혁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여러 단체들이 언론의 자유와 문화적 자유 확대를 요구하며 공개적으로 청원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지프코프는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산 지방 지도자들을 해임 및 처벌하는 동시에, 젊고 야심 있는 간부들을 발탁하여 자신의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이러한 조치는 공산당 내 그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10][11]
1962년 말, BCP 제8차 대회에서 지프코프는 당시 총리였던 안톤 유고프를 반당 활동 혐의로 기소하여 당에서 제명하고 가택 연금에 처했다. 이로써 당과 정부 양쪽에서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으며, 같은 해 총리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2. 3. 총리 및 국가평의회 의장 재임 (1962-1989)
1962년 지프코프는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각료 평의회 의장(총리)에 취임하여 실권을 장악했다.[89] 총리 취임 이후, 그는 흐루쇼프 해빙의 영향 아래 상대적인 사회 정치적 자유화와 탈스탈린주의 정책을 추진했다.[10][11] 이 과정에서 스탈린, 체르벤코프 등 과거 지도자들에 대한 인물 숭배로 간주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관련 기념물들이 철거되었고, "스탈린 산"은 무살라 산으로, "스탈린" 시는 바르나로 이름이 바뀌는 등 공공장소의 명칭이 변경되었다.[69][10][11][12] 지프코프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독점적 통제를 완화하고 노역 관행을 억제했으며, 과거 인민 법원에 의해 부당하게 선고받았던 인사들을 사면하고 정치적 재활시켰다. 대표적인 예로 작가 디미타르 탈레프는 복권되어 작품 활동을 재개하고 1966년에는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0][11][13]지프코프는 자신에게 비판적이거나 지역 내 불만을 야기한 지방 지도자들을 해임하고, 젊고 충성스러운 인물들을 그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당과 국가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공고히 했다.[10][11] 1962년 말 제8차 당 대회에서는 경쟁자였던 안톤 유고프를 반당 행위 혐의로 축출하고 가택 연금시켰다. 그러나 지프코프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한 반발도 존재했다. 1965년에는 이반 토도로프-고루냐 장군을 비롯한 일부 군 장교들이 스탈린주의-마오주의에 입각한 친중국 정권 수립을 목표로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은 "4월 음모" 또는 "고루냐 음모"로 알려져 있다.
1971년 7월 7일, 새로운 헌법(이른바 '지프코프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당과 국가 기관의 분리, 의회 권한 강화 등을 명시했으며, 집단 국가원수 제도로서 국가 평의회를 신설했다. 지프코프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신설된 국가 평의회 의장(국가 원수)에 취임했다.[89]
지프코프 정권은 소련과의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소련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다.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던 불가리아의 공업화를 추진하여 초기에는 상당한 경제적 안정과 발전을 이루었다.[89] 국민들은 이전 시대의 높은 실업률과 해외 노동 의존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과 경직성으로 인해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침체 국면에 빠졌다. 1982년 지프코프는 기업의 독립 채산제 도입, 서방 자본 유치 등 일부 경제 개혁을 시도했으나[90]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4년에는 정권의 통제가 강화되었다.[90] 같은 해, 불가리아 내 터키계 주민들에게 슬라브식 이름 사용을 강요하는 등 강압적인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하여 국내외적으로 큰 반발을 샀다. 1989년에는 터키계 주민들을 터키로 추방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단행했는데, 이는 노동력 감소를 유발하여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또한 지프코프는 자신의 아들 블라디미르 지프코프를 당의 요직에 앉히는 등 연고주의와 부패 문제도 심화되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의 바람이 거세지면서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 민주화가 급진전되고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정권이 붕괴하는 등 지프코프 정권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역시 페레스트로이카에 소극적인 지프코프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91][92] 당내에서도 개혁 요구와 지프코프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외무장관 페타르 믈라데노프가 지프코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사임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정치국원 요르단 요토프, 당 서기 디미타르 스타니셰프, 국방상 도브리 주로프 등 핵심 인사들이 지프코프에게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 11월 9일, 지프코프는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직 사임을 발표했고[93], 11월 17일에는 국가 평의회 의장직에서도 물러나면서 35년간 이어졌던 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3. 정책
토도르 지프코프의 장기 집권 기간 동안 불가리아의 정책은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추진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공업화를 통해 초기 성장을 이루었으나, 1980년대 이후 경직된 운영과 정책적 실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사회적으로는 인민 공화국 체제 하에서 생활 수준 향상을 도모하고 산업화에 따른 변화를 관리하려 했으며, 제한적인 서구 문물 수용도 이루어졌다. 외교적으로는 냉전 시대 동구권의 일원으로서 친소련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터키계 불가리아인 문제로 터키와 심각한 갈등을 빚고 국제적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 등 일부 비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는 1970년대 데탕트 시기 서방과의 제한적인 교류를 시도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변화의 흐름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체제 경직성을 드러냈고, 이는 결국 그의 실각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3. 1. 경제 정책
지프코프는 총리로서 소련에 충실한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전임자들과는 달리 일부 시장 개방적인 조치를 허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잉여 농산물의 이윤 판매를 허용하고 불가리아 정교회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는 등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14]지프코프 정권의 핵심 경제 정책은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공업화 추진이었다. 1971년 국가평의회 의장(국가 원수)에 취임한 이후에도 그는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던 불가리아를 공업 국가로 전환시키는 데 주력했다.[89] 이러한 정책 덕분에 불가리아는 유럽의 최빈국 중 하나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는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업화 중심의 경제 성장은 한계에 부딪혔고, 불가리아 경제는 점차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2년, 지프코프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기업의 독립 채산제를 일부 용인하고 서방 국가의 자본을 도입하는 등 경제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1984년부터는 정권의 통제가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다.[90]
같은 1984년에 시작된 터키계 주민에 대한 강압적인 슬라브식 이름 강요 등 민족 동화 정책은 심각한 사회 갈등과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특히 1989년에는 터키계 주민들을 대거 터키로 추방하면서 노동 인구가 급감했고, 이는 불가리아 경제 악화와 국내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국제 사회의 비판도 거세졌다. 또한, 지프코프는 자신의 아들 블라디미르를 당의 주요 직책에 임명하는 등 연고주의적인 행태를 보여 경제 운영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1987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을 추진하자 지프코프는 표면적으로는 이에 찬동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국내에서 의미 있는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다.[91][92] 이러한 경직된 경제 운영과 정책적 실책들은 1980년대 불가리아 경제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3. 2. 사회 정책
1950년대 중반, 불가리아는 소련식 중앙 계획 경제를 통해 일부 측면에서 전후 생활 수준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질 임금은 75% 증가했고, 육류, 과일, 채소의 소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의료 시설과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1957년에는 동유럽 국가 중 최초로 집단 농장 노동자들이 농업 연금 및 복지 시스템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16]
1960년대에는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약 678,000명의 농민이 농촌을 떠나 산업 현장으로 이동했다.[17] 이러한 대규모 인구 이동은 도시화를 가속화시켰고, 특히 소피아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주택 부족 문제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많은 조립식 아파트 건물을 건설하여 주택 공급을 늘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택들은 종종 비좁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 경제 개혁 시도와 함께 서방과의 제한적인 교류도 이루어졌다.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서구 상품을 판매하는 코레콤 상점이 설립되었고,[18] 코카콜라와 같은 서구 기업의 생산 라이선스를 받아 불가리아 내에서 제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신 경제 모델(NEM)의 실패와 외채 상환을 위한 고품질 상품 수출 등으로 인해 국내 소비재 공급 부족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22]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불가리아는 과학 연구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 불가리아 우주 비행사 프로그램을 통해 두 명의 우주 비행사를 배출하고 동구권 전체 전자 제품의 70%를 공급하는 성과를 거두었다.[25][26]
3. 3. 외교 정책
지프코프 정권 시기 불가리아의 외교 정책은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최우선시했다. 그는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국내 공업화를 추진했다.[89] 이는 냉전 시대 동구권 국가로서의 일반적인 외교 노선이었다.그러나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는 갈등도 존재했다. 특히 1984년부터 터키계 소수 민족에 대한 강압적인 동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터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정책은 터키계 주민들에게 슬라브식 이름 사용을 강요하는 등 민족 정체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내부적인 반발을 샀다. 1989년에는 수십만 명의 터키계 주민을 터키로 추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는데, 이는 심각한 인권 문제로 비화하며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노동 인구 감소로 불가리아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지프코프는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진영 국가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보였다.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 참석차 처음 일본을 방문한 이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이후 두 차례 더 일본을 방문했으며(총 3회 방일), 불가리아의 유력 인사들을 일본에 파견하는 등 교류를 확대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했다.[95]
1980년대 후반, 동유럽 전역에서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고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을 추진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변했다. 1987년 지프코프는 표면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에 동조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국내 정치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며 경직된 태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9년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가 실각하는 등 변화의 압력은 더욱 커졌다. 결국 개혁을 거부하는 지프코프에 대해 고르바초프 서기장마저 냉담해졌고,[91][92] 당 내부에서도 외상 페타르 믈라데노프를 비롯한 개혁파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 11월 9일, 지프코프는 당내 압력에 밀려 사임을 발표했고, 그의 오랜 통치는 막을 내렸다.[93] 또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유엔의 경제 제재는 불가리아 경제에도 간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3. 4. 문화 정책
1970년대 소련의 데탕트 정책을 따라, 지프코프 정권은 서방과의 문화적 접촉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36] 이는 서방 기술 도입 및 투자 유치와 함께 이루어진 개방 정책의 일환이었다.[36]4. 논란과 비판
토도르 지프코프의 장기 집권 기간 동안 그의 통치 방식과 정책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인권 탄압, 소수 민족에 대한 강압적인 동화 정책, 정적 암살 의혹 등은 그의 통치에 대한 심각한 비판점으로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한편, 지프코프는 억압적인 통치 방식 외에도 불가리아 문화 유산을 강조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967년부터 "우리 조국 불가리아"를 강조하며 민족주의 감정을 고취시키고,[39] 1970년대 후반에는 불가리아 정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등 전통 문화를 정권 유지에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39] 그의 딸인 류드밀라 지프코바를 1980년 과학, 문화, 예술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하여 불가리아 문화유산 홍보와 서방과의 문화 교류를 추진하게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40] 이러한 문화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국가 정체성 강화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다.[39][40]
또한, 지프코프 시대에 불가리아 스포츠가 국제 무대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성과 역시 국가주의 선전과 체제 우월성 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1956년부터 1988년까지 불가리아는 배구, 리듬 체조, 레슬링 등 다양한 종목에서 153개의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는 등 스포츠 강국의 면모를 보였다.
4. 1. 인권 탄압
1980년대 후반까지 지프코프 정권은 불가리아 지식인 사회의 불안을 효과적으로 억제했다.[39] 작가 연합 가입은 상당한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했지만, 이는 동시에 정권에 대한 지적 타협을 요구하는 수단이었다. 타협을 거부하는 작가는 연합에서 추방되어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게오르기 자가로프와 류보미르 레브체프와 같은 일부 반체제 성향 작가들이 체제 내로 포섭되기도 했다. 반면, 라도이 랄린과 같은 소수의 풍자 작가들은 날카로운 비판 때문에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활동해야 했다.[39]지프코프 정권 하에서 반체제 인사들은 지속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악명 높은 국가보안부 Държавна сигурност|DSbg는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의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정권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 목소리는 1980년대 후반까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82년 작가 블라가 디미트로바는 소설 『리체』에서 당 간부들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39]
당시 다른 많은 동구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불가리아 국민들은 해외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출국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등 기본적인 이동의 자유가 제약되었다.
1984년에는 소수 민족인 터키계 주민들에게 슬라브식 이름을 강요하는 등 강압적인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하여 큰 반발을 샀다.[90] 급기야 1989년에는 수많은 터키계 주민들을 터키로 강제 추방하는 비인도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심각한 인권 침해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 인구 감소를 초래하여 불가리아 경제를 악화시키고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자, 지프코프는 마지못해 이를 모방하는 시늉을 했지만 실제 개혁 의지는 없었다.[41] 오히려 인권 감시 단체의 여러 구성원을 당에서 추방하고,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지원 클럽" 결성을 시도한 지식인들을 체포하고 당에서 축출하는 등[42] 인권 탄압을 이어갔다.
4. 2. 동화 정책
1984년, 지프코프 정권은 불가리아 내 터키계 주민에게 슬라브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하는 등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했다[90]。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은 터키계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더 나아가 1989년에는 터키계 주민들을 터키로 추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노동 인구가 감소하면서 불가리아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국내 불안정과 국제 사회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화 정책은 지프코프 정권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평가받는다.4. 3. 게오르기 마르코프 암살 사건
1969년, 토도르 지프코프가 이끄는 공산 정권에 반대하여 영국으로 망명한 작가 게오르기 마르코프는 이후 BBC 월드 서비스 등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불가리아 정권을 비난했다. 1978년, 그는 런던에서 리신을 주입한 탄환에 맞아 독살되었다. 이 사건은 지프코프가 소련의 KGB 의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의뢰하여 KGB의 지원을 받아 불가리아 내무성의 요원이 저지른 범행으로 여겨진다.5. 몰락
1980년대 후반, 불가리아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토도르 지프코프 정권에 대한 국내외적 압력을 가중시켰다. 특히 지프코프 정권의 강경 노선과 인권 문제는 국제 사회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지프코프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한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는 1984년 12월부터 시행된 소위 "부흥 과정"이었다. 이는 불가리아 투르크인 등 소수 민족에게 슬라브식 이름을 강요하고 전통 문화를 억압하는 강제 동화 정책이었다.[45] 정부는 이를 민족 통합 캠페인이라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소수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져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1984년 12월 24일 멜치노에서 평화 시위가 열렸으나, 다음 날부터 경찰의 물대포 진압 등으로 폭력 사태로 번졌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이어졌다.[47]
1985년 1월에는 터키계 주민들의 조직적인 반대가 시작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반정부 무장 단체가 결성되어 정부 관리들을 인질로 잡거나 다리를 폭파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저항이 격화되었다. 1월 19일, 정부는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무장 저항 세력이 장악한 마을을 포위하고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47] 이름 변경 캠페인은 한 달 만에 종료되었지만, "부흥 과정" 자체는 계속되었다. 일부 저항 세력은 테러로 대응하여 바르나 공항, 플로브디프 중앙역, 여객 열차, 호텔 등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켜 사상자가 발생했다. 불가리아 국가 보안 위원회(CSS)는 42개의 불법 친터키 단체를 적발하고 테러 음모를 막았다고 발표했으며,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부흥 과정" 관련 사건으로 총 517명이 수감되었다.[46][47]
1989년 5월, 지프코프는 불가리아를 떠나고 싶은 사람은 터키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터키계 주민들의 반발을 과소평가한 실책으로, 약 36만 명 이상이 사실상 추방에 가까운 형태로 불가리아를 떠났다. 이 대규모 이주는 노동력 감소 등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주었으며,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부흥 과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지프코프 정권의 가장 큰 오점으로 평가받는다.[48][45][47] 훗날 2012년 불가리아 국민의회는 이 "부흥 과정"을 "전체주의 정권에 의해 수행된 민족 청소의 한 형태"로 규정하며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49]
"부흥 과정"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과 내부 불만은 지프코프 정권의 종말을 재촉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이미 지프코프를 동구권의 경직된 지도자로 보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터키계 주민 사태 이후 그를 교체할 결심을 굳혔다. 불가리아 내부에서도 총리 게오르기 아타나소프, 외무장관 페타르 믈라데노프, 재무장관 안드레이 루카노프 등 고위 관료들이 지프코프 제거를 위한 비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41]
1989년 10월, 소피아에서 CSCE 환경 정상 회담이 열렸을 때, 믈라데노프는 불가리아의 독립 환경 운동 단체인 에코글라스노스트를 초청했다. 그러나 회의 기간 중 에코글라스노스트 활동가들이 지프코프의 지시로 보안 경찰과 민병대에게 구타당하고 추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비난을 더욱 증폭시켰고, 믈라데노프 등 개혁파는 도브리 주로프 국방장관을 설득하여 지프코프 축출 계획에 동참시켰다.[41][42]
1989년 11월 9일, 정치국 회의를 하루 앞두고 주로프는 지프코프를 직접 만나 사임을 요구하며 정치국 내에 그를 해임할 충분한 지지가 있음을 알렸다. 지프코프는 상황을 되돌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음 날인 11월 10일 회의 직전, 주로프는 지프코프에게 사임하지 않으면 정치국 투표로 해임될 뿐 아니라 처형될 수도 있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결국 지프코프는 정치국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나이와 건강 문제를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의 후임으로는 페타르 믈라데노프가 선출되었다. 11월 17일, 국민 의회는 지프코프를 국가 평의회 의장직에서도 해임하고 믈라데노프로 교체했다.[50][41][42] 이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지프코프의 축출은 불가리아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12월 11일, 믈라데노프는 공산당이 통치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발표했고,[51] 이틀 후 중앙 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자유 선거 실시를 약속하고 헌법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 조항을 삭제할 것을 국민 의회에 요청했다.[52] 1990년 1월 15일, 국민 의회는 헌법 개정을 통해 공산당의 권력 독점 조항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이로써 지프코프가 35년간 통치했던 공산주의 체제는 그가 권력을 잃은 지 불과 두 달 만에 막을 내렸다.[41][42]
권좌에서 물러난 지프코프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존경을 받았으나, 곧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2월 13일, 그는 "법의 심각한 위반과 정치적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52] 믈라데노프는 지프코프의 통치가 불가리아를 "거의 심장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고 비판했으며, 당은 그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52]
이후 지프코프는 새로운 정권에 의해 5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기소 내용 | 판결 | 평결 |
---|---|---|
1 – 부흥 과정 관련 책임 | 사건 기각 | 소수자에 대한 범죄 무죄; 부흥 과정이 범죄로 입증되지 않음; 여러 번 재심사 |
2 – "좌익 노동자 조직" ("모스크바 기금") 자금 지원 관련 권한 남용 | 사건 기각 | 범죄 입증 불가 |
3 – 개발 원조 및 개발도상국에 대한 고위험 대출 제공 관련 책임 | 사건 기각 | 범죄 입증 불가 |
4 – 공금, 자동차 및 아파트를 보안 요원에게 제공한 횡령 혐의 (약 2400만달러 상당, 1990년 기준) | 초기 유죄 판결 (징역 7년) -> 항소심 감형 (1년 6개월) -> 최종 무죄 판결 |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
5 – 노동 수용소 운영 등 인권 침해 관련 책임 | 무죄 |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
출처:[53][54][55][56] |
지프코프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처음에는 횡령 혐의(기소 4호)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했고, 항소 법원은 형량을 1년 6개월로 감형했다.[53][54][55][56] 그는 사면 요청을 거부하며 자신의 무죄를 강하게 주장했다.[53][54][55][56] 1993년에는 인권 침해 혐의(기소 5호)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53][54][55][56] 1994년 횡령 혐의 형이 집행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가택 연금으로 대체되었다.[53][54][55][56]
1995년 불가리아 대법원은 그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고, 1996년 2월 9일, 검찰이 유죄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횡령 혐의에 대한 원심을 파기하고 최종적으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언했다.[53][54][55][56] 당시 검찰총장은 지프코프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라는 "강한 압력"이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53][54][55][56] 지프코프의 재판 과정은 줄리안 반스의 소설 ''고슴도치''(1992)에서 허구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했다.[57]
6. 퇴임 이후와 죽음
권력에서 물러난 후, 새로운 정부는 지프코프를 다섯 가지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주요 기소 내용은 '부흥 과정' 관련 책임, 국제 공산주의 운동 자금 지원 관련 권한 남용, 개발도상국에 대한 고위험 대출 제공, 공금 및 재산 횡령, 노동 수용소 운영 관련 인권 침해 등이었다.[53][54][55][56]
기소 내용 | 판결 | 평결 |
---|---|---|
1 – '부흥 과정' | 사건 기각 | 소수자에 대한 범죄 무죄; 부흥 과정이 범죄로 입증되지 않음; 여러 번 재심사 |
2 – "좌익 노동자 조직" ("모스크바 기금") 자금 지원에 대한 권한 남용 | 사건 기각 | 범죄 입증 불가 |
3 – 개발 원조 및 개발도상국에 대한 고위험 대출 제공 | 사건 기각 | 범죄 입증 불가 |
4 – 공금, 자동차 및 아파트를 보안 요원에게 횡령 | 무죄 |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
5 – 인권 침해 | 무죄 |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
출처:[53][54][55][56] |
지프코프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처음에는 횡령 혐의(기소 4호)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했다. 항소 법원은 원심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유죄를 확정했지만, 형량을 1년 6개월로 감형했다.[53][54][55][56] 당시 법원장은 지프코프에게 젤류 젤레프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하라고 권유했지만, 지프코프는 자신은 유죄가 아니므로 사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53][54][55][56]
1993년 6월 8일, 그는 인권 침해 혐의(기소 5호)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53][54][55][56] 1994년에는 횡령 혐의(기소 4호) 형이 집행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인해 가택 연금으로 전환되었다.[53][54][55][56]
지프코프는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했고, 1995년 9월 불가리아 대법원은 그의 상고를 받아들여 사건을 재심리했다. 1996년 2월 9일, 대법원은 검찰이 지프코프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모든 혐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언했다.[53][54][55][56] 이 과정에서 검찰총장이 사임하는 등, 검찰이 지프코프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도록 강한 정치적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53][54][55][56]
무죄 판결 이후 지프코프는 자유의 몸이 되어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며 말년을 보냈다. 지프코프의 재판 과정은 줄리안 반스의 소설 ''고슴도치''(1992)에서 허구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했다.[57]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을 "프라베츠 출신의 평범한 시골 소년"으로 묘사하며, 불가리아 사회주의를 사회 '질서'와 정부 '시스템'으로 나누어 평가했다. 그는 사회 질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관료적이고 경직된 시스템의 실패가 사회주의 붕괴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믿었지만, 미래의 사회주의는 새로운 형태가 될 것이며 젊은 세대가 "더 번영하고, 더 정의롭고, 더 민주적인 불가리아"를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는 당시 집권 중이던 우익 민주세력연합(UDF) 정부를 비판했지만, 퇴임 후 국유 자산을 횡령한 자신의 옛 공산당 동료들에게 더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8]
1997년 불가리아 국영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는 퇴임 직후 집권했던 안드레이 루카노프와 페타르 믈라데노프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들이 자신의 가치를 배신하고 국가를 경제적 파탄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믿지만, UDF를 포함한 여러 정당의 인사들과도 친구가 되었다고 덧붙였다.[58]
1998년 초, 지프코프는 불가리아 사회당에 복당하여 당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59]
1998년 8월 5일, 지프코프는 폐렴 합병증으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0] 그의 사망으로 검찰이 기각된 사건을 재개하려던 시도는 모두 중단되었다.[53][54][55][56] 당시 집권 중이던 UDF 정부는 전 국가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장 요청을 거부했으며, 장례는 사회당 지방 지부가 주관한 대규모 사적 행렬로 치러졌다.[53]
7. 유산 및 평가
석방 후 지프코프는 외국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회고록을 집필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긴 고백"이라 칭한 회고록에서 자신을 "프라베츠 출신의 평범한 시골 소년"으로 정의하며, 자신의 통치와 유산에 대한 분석과 함께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불가리아의 사회주의 사회를 국가의 기본 조직이자 정신인 '사회 질서'와 전위 정당이 이끄는 정부 구조인 '시스템'으로 구분했다. 그는 '사회 질서'는 적절하고 번영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사회주의 붕괴의 원인은 지나치게 관료적이고 경직되어 결국 실패한 '시스템'에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유지하면서도, 1970년대와 80년대 시스템 개혁 및 현대화 실패가 궁극적인 붕괴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믿었으나, 이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가 될 것이며, 젊은 세대가 "더 번영하고, 더 정의롭고, 더 민주적인 불가리아"를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는 당시 집권 중이던 우익 UDF 정부를 비판하는 한편, 가장 강한 비판은 자신이 물러난 후 국유 자산을 횡령한 옛 당 동료들에게 향했다.[8]
1997년 불가리아 국영 텔레비전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그는 UDF 정부보다 자신의 퇴임 직후 집권했던 안드레이 루카노프와 페타르 믈라데노프 같은 옛 공산당 출신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더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배반하고 국가를 경제 파탄으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했으며, 자신의 옛 당이나 공산주의 분파에 다시 합류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믿지만, UDF를 포함한 여러 정당의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의 행동 대부분을 옹호하면서도 "'질서'는 좋았지만 그것을 지배한 '시스템'은 나빴다"는 믿음을 재차 강조했다.[58]
1998년 초, 불가리아 사회당 내 권력 구도 변화로 지프코프는 당에 복귀하여 집회에서 당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59] 그는 같은 해 8월 5일, 기관지 폐렴 합병증으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0] 그의 사망으로 진행 중이던 재판은 기각되었다.[53][54][55][56] UDF가 이끄는 정부는 그의 전 국가 원수 지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사회당의 국장 요청을 거부했다. 장례는 지방 사회당 지부가 조직한 대규모 사적 행렬로 치러졌다.[53]
지프코프 사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유산은 불가리아 대중문화 속에 남아 있다. 그의 모습이 담긴 노래,[61] 셔츠, 기념품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62][63] 2011년에는 네세바르에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빌보드 광고판이 세워지기도 했다.[64][63] 그의 초상화, 포스터, 달력 등은 여전히 흔하며 일부 시장들이 이를 게시하거나 배포하기도 한다.[63][65][66] 2019년 사망 21주기에는 스몰랸 지역에 그를 국민 영웅 흐리스토 보테프에 비유하는 부고가 게시되기도 했다.[67]
2001년, 그의 고향 프라베츠에는 공산주의 시대의 지프코프 기념비가 재건립되었는데, 여기에는 불가리아 사회당 지도자들과 당시 총리이자 지프코프의 전 경호원이었던 보이코 보리소프도 참석했다. 2002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고향에 세워졌다.[68] 이후 매년 9월 7일 그의 생일 기념행사는 점차 전국적인 행사로 발전했으며, 2012년부터는 유럽 연합 깃발과 함께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69][70][71][72] 2013년에는 오두르네 마을에 두 번째 지프코프 기념비가 세워졌다.[73]
현대 불가리아에서 지프코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의 통치 시기에 대한 향수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사회학 조사는 이를 뒷받침한다. 2010년대 조사에서 지프코프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41%에서 55% 사이로 나타났으며, 부정적 평가는 18%에서 25% 수준이었다. ''RC 트렌드'' 연구에서는 지프코프가 페트코 카라벨로프, 스테판 스탐볼로프, 알렉산다르 스탐볼리이스키와 함께 역대 가장 지지율이 높은 불가리아 정치인 5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갤럽 인터내셔널 협회 조사에서는 불가리아인의 74%가 지프코프 사임 후 집권한 정치인들, 특히 UDF 지도자 이반 코스토프(응답자의 49%가 비난) 때문에 국가가 "파멸"되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RC 트렌드 조사 응답자의 절반은 현대 공화국에서 사는 것보다 '지프코프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74][75][76]
연도 | 긍정적 | 중립적 | 부정적 | 의견 없음/모름 | 출처 |
---|---|---|---|---|---|
2014 | 55% | 20% | 25% | - | 알파 리서치 |
2017 | 41% | 33% | 18% | 8% | RC 트렌드 |
2019 | 45% | - | 22% | 33% | 갤럽 |
진술 | 동의 | 중립 | 반대 | 의견 없음/모름 | 출처 |
---|---|---|---|---|---|
불가리아는 지프코프 사임 이후 잘 발전하고 있다 | 10% | 21% | 50% | 30% | 알파 리서치 |
과거로 돌아가 현대 공화국에서 계속 사는 것보다 지프코프의 불가리아에서 살고 싶다 | 41% | - | 41% | 18% | RC 트렌드 |
지프코프 사임 이후 국가는 파멸되었다 | 74% | - | 16% | 10% | 갤럽 |
2019년에는 불가리아 주요 출판사 5곳의 역사 교과서가 지프코프를 '보통 사람들의 복지를 개선하려 한 온건한 통치자'로 묘사하여 논란이 일었다. 이는 불가리아 아메리카 대학교 교수진과 탐사 보도 언론인들의 비판을 받았다.[77] 당시 집권 중이던 중도 우파 게르브 정당, 특히 교육부 장관 크라시미르 발체프는 이를 "피비린내 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학문적 향수라며 교과서 수정을 지시했다. 이 명령은 불가리아 사회당의 반발을 샀으며, 사회당은 발체프 장관이 역사 수정주의를 행하고 교육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며 특정 세계관을 비민주적으로 강요한다고 비판했다.[78][79][80]
지프코프 시대는 불가리아 현대사에서 중요한 시기이다. 그의 통치 하에 전형적인 농업 국가이자 유럽 최빈국 중 하나였던 불가리아는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 아래 상당한 공업화를 이루었고, 국민들은 최소한의 생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이면에는 권위주의적 통치, 계획 경제의 경직성으로 인한 비효율과 1980년대 이후의 경제 침체, 터키계 불가리아인에 대한 강제 동화 정책과 같은 소수 민족 탄압, 그리고 아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연고주의와 부패 문제도 존재했다.
1989년 지프코프 정권 붕괴 후 불가리아는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동구권 시장 상실과 유고슬라비아 전쟁 관련 경제 제재는 큰 타격을 주었으며, 생활 수준은 이전 시대보다 크게 하락한 것으로 평가된다. 1990년대의 혼란 속에서 미흡한 경제 개혁과 금융 불안정, 1998년 러시아 금융 위기의 여파는 실업률 증가와 생활 수준 하락을 심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소수 과두재벌(올리가르히)과 대지주가 부상하며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고, 러시아 마피아의 유입 등으로 조직 범죄가 성행하며 치안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체제 전환기의 혼란과 어려움은 일부 불가리아인들 사이에서 지프코프 시대의 '안정'을 그리워하며 그를 재평가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8. 가족
지프코프는 1938년 마라 말레예바(1911–1971)와 결혼하여 두 자녀, 딸 류드밀라 지프코바와 아들 블라디미르 지프코프를 두었다.
아내 마라 말레예바는 1969년 위암 진단을 받고 2년간 투병했다. 지프코프는 수술을 원치 않던 아내를 설득하여 수술을 받게 했으나, 암은 이미 말기 상태였다. 1971년 8월부터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같은 해 10월 23일 사망했다. 지프코프는 아내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으며, 이후 몇 주간 예측 불가능해지고 자제력을 잃었다고 묘사되었다.[8][85] 말레예바는 생전에 딸 류드밀라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으며, 남편에게 가족 구성원을 정치적 직책에 임명하지 말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85]
딸 류드밀라 지프코바는 매우 유명하지만 논란이 많은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녀는 이단적이고 다양한 예술적 아이디어를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 종교와 신비주의를 실천하여 국가 무신론 지지자들과 불가리아 정교회 모두의 분노를 샀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지프코프는 주변의 설득으로 예술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류드밀라를 우호 및 문화 외교 자문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류드밀라는 이 자리에서 문화적 자유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동시에, 그녀의 아방가르드 취향은 일반 대중에게는 이해받지 못했다. 그녀는 불가리아 국가 1300주년 기념비 제작을 제안하며 아방가르드 조각가 발렌틴 스타르체프에게 디자인 전권을 부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 결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일반적으로 매우 추하다고 이해되는 논란이 많은 기념비가 탄생했다. 토도르 지프코프는 그것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매일 통근 경로를 변경했다고 전해지지만, 조각가를 꾸짖은 적은 없었다. 류드밀라는 특이한 생활 방식, 실패한 관계,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고, 1981년 3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2][85][86]
지프코프의 사위 이반 슬라브코프는 불가리아 국영 텔레비전 회사의 회장이 되었고, 나중에는 불가리아 올림픽 위원회 회장이 되었으며, 2005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9. 한국과의 관계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였지만, 자본주의 국가이자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 참석을 계기로 일본을 처음 방문한 이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두 차례 더 일본을 방문했으며(총 3회), 불가리아의 유력 인사들을 연이어 일본에 보내 "일본 로비"를 형성하기도 했다.[95] 지프코프는 이후에도 일본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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